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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 앤서니 브라운展: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 어린 시절 읽었던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한 여자가 세 남자를 탑처럼 쌓아 업고 있는 표지는 심플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돼지로 변한 남편 피곳 씨와 두 아들 사이먼이 어두운 집안을 씩씩대며 음식을 뒤지는 장면은 어린 내게 공포 영화 못지않은 섬뜩함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알록달록한 색채로 평범한 가정집을 그려냈음에도 그림 속엔 묘하게 차갑고 딱딱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 또렷이 떠오른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앤서니 브라운의 작품 세계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전시 「앤서니 브라운展: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이 5월 2일부터 9월 28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층에서 열린다. 『돼지책』을 비롯해 작가의 초기작부..
재능은 선택받는 거라지만 – 보이 인 더 풀 * 본 리뷰는영화 「보이 인 더 풀」의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을 시작으로 제24회 사오슝영화제 초청, 제2회 오키나와범태평양국제영화제 경쟁, 제17회 헝가리한국영화제에 초청된 영화 「보이 인 더 풀」이 오는 5월 14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보이 인 더 풀」은 수영을 좋아하는 소녀 석영과 물갈퀴를 가진 소년 우주가 만나며,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 멜로 영화다. 「보이 인 더 풀」로 첫 장편 데뷔를 한 류연수 감독은 연출 의도에 대해 “어쩌면 놓쳐버린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 점점 빛을 잃어가는 것 같아도 찬란히 빛났던, 그 시절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 첫사랑처럼”이라고 밝혔다.또한 「보이 인 더 풀」을 통해 댄스 크루 ‘훅’의 멤버 효우가 배우로 변신해..
당일치기로 페스티벌 떠나기 – 2025 사운드베리 씨어터 Soundberry Theater 3월 22일과 23일, 2025 사운드베리 씨어터가 올해 페스티벌의 시작을 알렸다.사운드베리 씨어터는 실내 페스티벌의 대표주자로 올해도 KBS아레나에서 단일 스테이지로 진행되었다. 페스티벌에는 화창하든 폭우가 쏟아지든 탁 트인 하늘과 눈에 꽂히듯 타오르다 무대 뒤로 넘어가는 태양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실내 환경 덕분에 날씨와 자연적인 요인에 구애 받지 않고 더 좋은 컨디션으로 오랫동안 페스티벌을 즐길 수 있었다.1일차에는 Hi-Fi Un!corn, 후이, 소수빈, 죠지, 10cm 등이, 둘째 날엔 원위, 카더가든, I.M, 하현상 등이 출연했다.  2025 사운드베리 씨어터의 첫 무대를 꾸민 거니는 다가오는 봄에 어울리는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R&B 음악을 선보였다. 마침 반..
명작 동화로 읽는 서양사 -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학창 시절에는 교육 과정으로 역사를 접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한국사 자격증 시험을 치루느라 역사를 공부했다. 돌이켜보면 역사를 공부하는 방법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연표를 펼쳐 놓고 시간순으로 큼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위주로 맥락을 이해한다. 또 왕이라던가 과학 발전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유명한 과학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장군처럼 역사 속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을 기억한다. 하지만 양은 너무 방대하고, 건조하게 서술된 사건들과 연도를 표기한 숫자들은 반복하지 않으면 금세 휘발되기 좋았다. 이처럼 내가 태어난 한국과 인접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르는데, 먼 서양의 역사에는 더욱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아쉬운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박신영의 『..
커튼 뒤 욕망과 무의식 - 서울세계무용축제 비성적(非性的) 관계를 순수로 포장하며 육체적 관계를 폄하하는 일은 자칫 자아와 신체 사이에 괴리감만 심을지 모른다.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느낀다면 ‘사랑’이 무엇인지 더 깊이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타액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과 결단의 행위다. 작품은 무의식의 신체가 보여주는 미묘한 찰나의 역동성을 탐구한다.- 작품 설명 공연장의 스태프가 관객 입장을 안내하는 소리가 들리고, 관객석을 비추는 조명이 아직 환한 가운데, 무대의 한쪽에서 프리쇼가 진행되었다. 붉은 커튼을 경계로 한 명의 댄서가 하반신만으로 연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상반신은 아직 커튼 안쪽에 감춰진 채였다. 댄서는 발끝을 꿈틀거리듯 오므렸다가 펴고, 다리를 곧게 만들었다가 천천히 굽..
감정을 선명하게 바라보기 - 슬픔에 이름 붙이기 감정은 뭉툭한 어떤 느낌으로 스쳐 지나가 버리는 경우가 많다. 감정은 복잡하고 추상적이며 또 언어는 제한적이어서 그에 꼭 맞는 하나의 이름을 찾는 건 세계 각국의 언어로 지구 한 바퀴를 다 돌아도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감정의 구체적인 형상을 빚으려는 시도를 지속해왔다. 외로움을 외로움이라 말하는 대신 “집에 있지만 집에 가고 싶다”거나 “같이 있는데 꼭 혼자 있는 것 같다”는 표현으로 바꿔 말하는 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작업이다.   하지만, 여기 12년에 걸쳐 감정에 적확한 언어를 찾는 일에 도전해온 사람이 있다. 『슬픔에 이름 붙이기』을 쓴 존 케닉이 그 주인공이다.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쓴..
낡지 않는 아름다움 -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어릴 적 즐겨 들은 대중가요를 떠올리면 그 시절 유행하던 휴대폰이나 광고처럼 다양한 기억들이 약간 바랜 필름처럼 감겨 딸려오는가 하면, 클래식은 꼭 시간의 압력을 언제나 덜 받는 것처럼 쭉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듯 하다. 몇 백 년이라는 역사의 겹을 떠올리면 잘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낡지 않고 늙지 않는 힘이 있다. 클래식 작곡가의 이름은 생소하고, 작품의 번호가 표시되어 있는 제목은 더 생소하지만, 통화 연결음으로 익숙한 비발디의 ‘사계’, 학창시절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던 종소리나 공포영화의 한 장면으로 더 강하게 남아있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처럼 클래식은 항상 가까운 생활과 문화 속에 살아 숨쉬어 왔다. 공연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는 클래식을 가장 클래식 답게 표현하고 살린 공연이었..
삶의 메모리를 최적화하는 연습 - 20%만 쓰는 연습 돌이켜보면 효율은, 내가 타고난 재주도 아니었을뿐더러 여러 선택의 갈림길에서 대개 내가 선택하는 가치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생산성에 대한 열망은 늘 있어왔는데, 무엇보다 양적인 기대치에 도달하는 일이 버거웠다. 특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새로운 자극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요즘 같은 환경에선 욕망들을 가지치기 해야 한다는 필요까지 따라붙었다. 여러 이유로 원하는 만큼 일을 해내기 위해선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거나 내 역량 부족의 탓으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는데 점차 성실한 노력이나 열정 같은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현실에 부딪히면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시간과 집중력과 돈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는 것을 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