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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어린이를 위한 다정한 시선 - 『열두 살 장래희망』 초등학생 시절부터 대학 지원서를 내던 고등학교 3학년까지 1년에 한 번씩은 장래희망을 작성해 선생님께 제출해야 했던 걸 기억한다. 부모님이 희망하는 나의 장래와 함께 줄지어 놓인 두 빈칸은 특히 고등학생 시절엔 대학 입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생활기록부에 기록되는 일부였기에 함부로 적을 수 없었다. 3년의 기록은 지원하는 학과 분야에 학생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관심을 지녀왔는지에 대한 근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 4년을 재학하는 동안까지도 워크넷의 직업리스트를 구경하며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1학년의 장래희망과 3학년 때의 장래희망이 달라 생활기록부를 앞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게 보인다. 또한 고등학생 시절 실제로 기재했던 세 가지 장래희망 중 어느 것도 당시의 내가 직업 삼고..
삐뚤어진 마당이 있는 나의 집을 찾아서 - 『땅따먹기』 『땅따먹기』는 총 7개의 장으로 구성된 장편동화다. 장은 다음과 같이 분류되어 있다. 첫 번째와 마지막 장은 각각 미영이와 기영이의 시선을 담았으며, 사이에 놓인 다섯 개의 장은 동물 캐릭터들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차례로 꼬꼬, 짹짹이, 누렁이, 모질이, 서생원의 이야기다. 작품은 동물 캐릭터가 중심이 된다. 그런데 사람을 동물로 대신해 보여주는 방식이 아닌 동물을 의인화한 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이나 성별에 대한 통상적인 관념이 적용되지 않았던 점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어린이와 어른의 구도는 있었다. 천진하고 호기심 많은 닭 꼬꼬, 그리고 서로 친구가 되는 참새 짹짹이와 고양이 모질이는 어린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동물들 사이에서 누렁이 ‘아저씨’로 불리는 미영이네 개..
여름처럼 - 『내 기분은 여름이야』 계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한다. 새로운 계절이 찾아오면 예민하게 감각을 세우고 풍경과 향과 온도를 관찰한다. 계절을 통해 시간을 읽는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방 공기의 흐름은 나의 생활을 미묘하게 달리 바꿔놓는다. 타인과 계절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이 계절을 통해 경험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겁고, 계절을 읽는 타인의 시선을 들음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호감이나 애정을 더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어떤 계절을 닮은 사람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나아가 나는 어떤 계절을 닮고 싶은지, 다른 사람이 보는 나는 어떤 계절을 닮은 사람인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계절은 많은 것을 치환한다. 여름이라 부를 날들이 한 달 남짓 남은 시점, 조금 이르게 올해의 여름을 되돌아보자면..
그림책 뜯어먹기 Part.2 – 「지각대장 존」 : 존의 지각을 ··· 쉿 (응원합니다) 나는 지각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지각하지 않았던 10대를 돌아보며 : 어린이·청소년 문학을 손에 쥐는 이유 학창시절 생활기록부의 개근상과 모범상이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으로 점철되었던 나의 10대를 상징하는 바다. 나는 때때로 이 증표들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나의 정체성 중 큰 부분을 이곳에 자발적으로 부여했다. 하지만 20대로 들어섰던 즈음을 기점으로 학창시절을 기억하는 방식의 모양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보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시간과 일과를 관리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이면서 차츰 각성하게 된 것이 주된 요인이다. ‘교칙’, ‘학생의 본분’ 따위로 강요되던 규율 중 몇몇은 인권 침해의 요소가 다분했다. 그러나 그 폭력성을 감각으로나마 체감하면서도, 나는 ..
어둠이 말한다, 살아보자고 - <아무도 없는 곳> : 대화 외부의 공간에 앉아 또 다른 나들의 이야기를 엿듣다, 영화 인간은 객관적인 세계에는 직접 도달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 존재다. 우리 각자의 세계 중심엔 ‘나’가 있고 외부세계는 각자의 경험을 토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인간에게 문화예술이란 일종의 수단으로써의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 ‘나’밖에 모르던 우리가 문학, 영상, 음악, 공연, 미술 등 다양한 방식으로 형상화된 언어를 통해 외부세계와 상호작용하면서 ‘너’의 곁에 서는 법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은 놀랍게도 ‘나’로 귀결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결국 나를 알아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귀결되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문화예술이란 사랑이 그러하듯 ‘나’와 ‘타인’을, 나아가 함께하는 ‘우리’에 대한 본질적인 앎을 ..
쓰고 달아, 달고 써 - 「위저드 베이커리」 : 선택이라는 가장 보통의 마법이 쥔 저울, 의무와 권리 *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2월 스포츠계에서 시작되어 연예계로까지 번진 이른바 ‘학투(학교폭력 미투)’로 한동안 세간이 시끄러웠다. 특히 학투 논란은 과거의 시제로 고발되는 성격을 띠기 때문에, 연예 기획사나 소속 협회의 대처 방식 또는 첨예한 진실 공방 등 다양한 쟁점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과거의 일을 개인과 사회가 ‘책임’지는 마음가짐과 그 방식에 대한 고민이 주요하다는 생각이다. 학폭 논란에 연루된 개인들 그리고 사건 당시 그들이 올바른 책임을 지도록 가르치지 않고 폭력을 묵인한 어른들 모두가. 이처럼 잘못된 선택과 그에 따르는 책임에 관한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중 떠오르는 소설 한 권이 있었다. 구병모 작가의 장편소설..
걸그룹에게 더 많은 목소리를 Part.2 – 걸그룹과 걸크러쉬 : 편협한 정의로서 공유되는 현재의 걸크러쉬 트렌드에 관하여 ※ 이 글은 [Opinion] 걸그룹에게 더 많은 목소리를 Part.1 - (여자)아이들 [음악] 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걸크러쉬가 확장한 여성 서사 현재의 걸그룹 산업 내 대세를 이루는 키워드는 단연 ‘걸크러쉬’다. 걸크러쉬 콘셉트가 걸그룹 음악 서사의 확장을 이룩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 의의는 ‘섹시’, ‘청순’, ‘큐티’에 새 국면의 선택지가 더해졌다는 데 있다. 걸크러쉬 콘셉트는 크게 세 가지 코드를 전복시킨다. ‘걸그룹 화자는 사랑에 주체적이지 못하다’, ‘걸그룹은 착하고 상냥하다’, ‘걸그룹은 성적으로 대상화될 위험에 노출된다’. 가령 사랑에 진취적인 여성 화자를 걸크러쉬의 기호로 들 수 있다. 또 몸선을 강조하지 않고 노출이 과..
판타지가 세상을 구한다 - 네버엔딩 스토리 : "내가 구해줄게, 꿈꾸는 대로 할 거야" *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젠 철이 들었으니 꿈에서 벗어나서 현실에 맞게 살아야지, 그렇지?” 영화 는 상상과 몽상을 즐기는 소년 ‘바스챤’이 책 속 세계를 모험한다는 판타지 장르의 모험기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소년 바스챤은 약하고 왜소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자주 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바스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들에게서 도망치는데, 도망을 치다 우연히 숨어들어온 서점에서 의문의 책 한 권을 발견한다. 책의 제목은 ‘네버엔딩 스토리’. 바스챤이 읽는 이 소설은 보라색 물소 사냥꾼 초원족의 위대한 전사인 ‘아트레유’의 모험기다. 소설 속 세계 ‘판타지아’는 ‘나씽(nothing)’이라는 악의 존재에 의해 파괴될 위기에 처한 공간이..